속죄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값싼 칭의론에 영향을 받은 일부 정통 보수주의 목회자들로 인해 속죄의 은혜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며, 많은 이들이 단지 이론적으로만 알 뿐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그 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속죄 교리를 확고히 정립함으로써 기독교의 본래 위치를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두 속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죄가 어디에 기록되어 있으며, 어떻게 그 죄를 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에 대한 기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예레미야 17:1).
이 말씀을 통해 죄가 마음 판에도, 제단의 뿔에도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죄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주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고 증언합니다(히브리서 7:14).
또한,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면 유다 족속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29).
그리고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된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 참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겉모양의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니라” (로마서 2:28-29).
따라서 영적인 관점에서 “유다의 죄”란 곧 우리의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과 제단의 네 뿔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7장 11절에서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고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도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죄의 방법을 보면, 대제사장은 먼저 송아지와 염소를 죽이고 그 피를 제단의 네 뿔에 바른 후, 피를 일곱 번 뿌려 제단을 성결하게 합니다. 이는 죄의 값이 사망이기 때문에, 생명의 피를 흘리는 것이 죄 지은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다음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염소(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온 백성의 죄를 자복한 후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냅니다. 이는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가 대신 짊어지고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속죄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의 죄 씻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히브리서 10:1-4).
그렇다면 이 그림자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히브리서 10:9-10).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 아사셀: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유월절 양: 고린도전서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 화목제물: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대속물: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따라서 구약의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며,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며(히 4:15, 요일 3:5, 고후 5:21),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습니다(히 9:14, 벧전 1:19).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며, 모욕하는 사람에게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위협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벧전 2:22-23).
이렇게 흠 없는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마 26:28, 엡 1:7).
-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십니다(요 6:53-56).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십니다(롬 5:9).
- 하나님과 화평하게 합니다(골 1:20).
-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히 10:19).
-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히 13:12).
-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십니다(히 9:14).
-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십니다(벧전 1:18-19).
-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7).
-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계 1:5).
-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계 5:9).
-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깨끗한 옷을 입혀 주십니다(계 7:14).
- 사탄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계 12:11).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크고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칭의론의 완성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은 나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로마서 4:25)
즉,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칭의(Justification) 가 예수님의 부활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칭의론은 십자가 신학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으며, 반드시 부활 신학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칭의론을 십자가 신학에만 집중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 신학 또는 포스트모던 신학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며, 온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린도전서 15:17, 개역개정)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고, 우리 각 사람의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속죄의 피는 흘려졌지만,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 피를 각 사람에게 뿌릴 대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피 뿌리는 권세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대제사장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17-3:1, 4:14-15, 5:6-10, 개역개정). 이것이 히브리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신앙(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후,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여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16, 9:24, 개역개정).
- 피 뿌림은 육안으로 보이는 의식이 아니라 영적인 실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피 뿌림의 예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피 뿌림은 구약에서처럼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물리적 제사가 아니라, 영적인 실제(reality)로서 믿음으로 참여하는 의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는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라” (히브리서 11:28, 개역개정)
이 구절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사건을 가리키며, 피를 뿌림으로써 멸망이 지나갔던 구원의 표징을 믿음으로 행한 예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피 뿌림에 참여하는 방식 역시 믿음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임을 뜻합니다.
-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
신약 시대의 성도는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이 아닌, 하늘 성소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은 우리 신자들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6, 개역개정)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믿음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의 보혈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고백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으로 드리는 피 뿌림을 구하는 기도이자 신앙의 반응입니다.
- 예수님은 어디에 피를 뿌리시는가?
히브리서 10장 22절은 피 뿌림의 구체적 대상이 우리의 마음임을 밝힙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개역개정)
여기서 “마음에 뿌림을 받아”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양심과 마음에 기록된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17장 1절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예레미야 17:1, 개역개정)
즉, 죄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내면 깊은 곳, 곧 마음 판에 새겨진 본질적인 타락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뿌리시는 피는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 구약의 유월절과 피 뿌림의 모형
출애굽기 12장 7절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명령을 기록합니다: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애굽기 12:7, 개역개정)
이 장면은 히브리서 11장 28절의 해석처럼, 믿음으로 피를 뿌리는 영적 예배의 모형이었습니다. 당시의 눈에 보이는 피 뿌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였고, 오늘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실체에 참여하게 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베드로전서 1장 2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뿌려 구속하신 사람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계시록 5장 9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사도행전 20장 28절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렸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로마서 1장 5-6절과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의 양심은 어떻습니까?
그 양심은 부패하고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의 양심은 어떠해야 합니까?
히브리서 10장 22절과 9장 14절은 ‘착한 양심’, ‘선한 양심’을 말합니다.
선한 양심이란,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양심입니다.
이 고백은 진실한 신앙 고백이며, 이는 곧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며 살겠다”는 결단과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으면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 피 뿌림의 은총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으로부터 피 뿌림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가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 곧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 없습니다.
비록 당신이 기도, 금식, 성경 공부, 구제, 성도의 교제 등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 을 성실히 행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심지어 성직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총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단지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에 불과합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 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은 확실한 증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말씀을 떠오르게 하실 때, 그는 즉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삶입니다.
칭의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성화의 삶은 그저 이상일 뿐, 실제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곧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상태라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투게 됩니다.
성경은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칭의의 은혜는 죄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칭의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종입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화는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칭의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린도전서 15:10)
구약 시대에 제단의 네 뿔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심판과 자비를 상징했습니다.
죄를 범한 자는 자복하며 피를 바르고, 뿔을 잡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제단 뿔에 기록된 죄는 상징적으로 보존되었고, 이는 그림자에 불과한 제사 체계였습니다.
이 그림자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의 번제단이며,
그분의 피가 십자가의 네 뿔, 곧 전 인류를 향해 뿌려졌습니다.
따라서 제단 뿔에 기록된 유다의 죄,
곧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지 못하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이 고난받으셨고, 모든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기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복음을 떠나, 기독교를 단지 정의와 윤리를 추구하는 종교로 전락시킵니다.
즉, 예수의 피를 각 개인의 마음에 뿌려야 한다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회 정의 실현만을 추구하는 율법주의 종교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 없이 오직 율법으로 죄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는 비복음적인 정당성 추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로마서 2:1–5)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분이시다” (야고보서 4:11–12)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한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4:25)
누구든지 믿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주 예수께서는 그 마음에 자신의 피를 뿌려 주심으로써 그를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자로 구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 뿌림의 은총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은
“나는 이제 내 뜻대로 살 수 없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공통적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 고백 위에 성령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 내주하시며,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삶, 곧 세상의 소금과 빛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세상은 생명의 복음을 보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일부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칭의의 은총이 교회 성장과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복음의 핵심인 값비싼 은혜(본회퍼) 대신 값싼 칭의론(Cheap Justification)이 설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며, 교회는 점차 세속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복음주의의 세속화와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이며, 이 신학은 종종 종교다원주의와 연결되어 전통적 교리를 해체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특히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칭의론은 기독교를 부패시킨 교리이며,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약화시켰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신화적 또는 문학적 상징으로 해석하려 하며, 이를 위해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학문적 틀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당대 로마 제국이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신의 아들, 구세주”로 고백했던 맥락 속에서 기독교가 예수를 그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고백하기 위해 만든 신화적 서술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의 부활 또한 본래는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의롭게 살다가 죽임당한 순교자 공동체 전체에 대한 상징적 고백이었으며, 초대교회가 이를 예수 한 분의 개인적인 부활 사건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실제의 역사적 부활 사건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려는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한편에서는 복음을 값싸게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복음을 상징화하며 탈역사화하려는 신학적 흐름 속에서, 교회는 점점 복음의 본질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부인하지 않지만, 그 대신 예수의 정신과 삶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 사역을 상징적 의미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 속에서, 성경적인 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은 더 이상 현대인에게 적절하지 않은 과거의 신학 혹은 신앙적 골동품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복음주의 신학자들보다도 세상 속에서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듯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사회적 정의나 생태신학 같은 이슈들을 통해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옹호하면서 심지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도 동성애자였다는 주장을 신학화하였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복음을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대체하려는 신학적 조류가 국제 신학계에서 공공연한 흐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성경적인 칭의론의 회복과 재정립은 더없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칭의론이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십자가에서 이미 사탄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려는 사탄의 권세를 어디서든 무력화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거룩하게 된 제단에 닿는 모든 것은 거룩하게 되며,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출 29:37, 마 23:19 참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십자가에 닿는 모든 것 역시 거룩하게 됩니다.
이때 “닿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종교적 감정이 아닌,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앙의 참여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라디아서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곧,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했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그의 존재 전체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이 거룩함은 단지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라는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칭의의 은총을 받았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 자는 하나님께 드려진 자, 곧 거룩한 자입니다.
거룩하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6:15)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자는, 더 이상 죄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6:14에 기록된 것처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예를 들어, 아무리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해도,
거룩한 자는 이웃을 해하는 죄, 거짓 증언의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6~9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으며,
죄를 짓는 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의로운 자는 그분처럼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므로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로 난 자는 그 정체성과 본질로 인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의 나는 왜 죄를 이길 수 없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1–25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자 원하지만, 내 안에 악이 함께 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는 또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며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다.”
왜 그는 이렇게 말했을까요?
율법의 계명들—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를 알기 전에는
그런 행동들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롬 7:9).
그래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남을 정죄하며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살았을 때”, 즉 죄에 대해 무지하고 죄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그 죄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여전히 살아 있어
자신도 모르게 형제를 판단하게 되고 결국 다시 죄를 짓습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나는 죄의 종이며, 율법은 나를 생명이 아니라 사망으로 이끌었다.” (롬 7:11)
이 모든 고백은 바울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 아래 팔린 존재다.” (롬 7:14)
즉, 율법은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죄의 종이며 사망의 길을 걷는 자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자는 죄에서 해방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죄 아래 팔린 나를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 구속 사건을 통해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게 되었고, 내 삶은 육신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시기 전에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의 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 안에서 살며,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롬 6:15)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신 새 본성은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 7장은 육신에 매여 죄와 싸우는 신자의 고뇌를 보여주고,
로마서 8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와 성령의 내주로 인한 승리를 선포하는 장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요 9:39-41). 그리고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이 내 마음에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대로 말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 예수님의 몸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적 칭의론으로 기독교인들이 기초를 가진다면 기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신뢰받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7).
예수님은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복음 9:39–41).
또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브리서 10:38)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하고, 성령께서 마음에 기억나게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생명을 전하고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적인 칭의론 위에 기초를 세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신뢰받는 교회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