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려면 반드시 칭의의 은총을 먼저 받아야 한다. 죄를 범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칭의라 한다. 칭의는 죄의 용서로 사면을 의미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2-26).
무슨 말씀인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훼손될 수 없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내 대신 누가 내 죄 값을 지고 죽으면 나는 죽음을 면하게 되는 법이다. 여기서 내 죄를 대신 한다면 나와 동일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죄가 없어야 한다. 거기에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뿐이 없다. 예수님은 창조주이며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사람으로 나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로 인해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하였더라도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 짐을 받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게 된다(롬 4:7-8). 조건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믿음이다. 문제는 칭의의 은총을 사모할 정도로 자신이 불경건하고 악한 자임을 시인했느냐 이다.
하나님의 의가 깨달아 지고 내게 적용되려면 반드시 주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주의 영광과 관련된 말씀을 보면, 눅 24:26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였고.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나갔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 13:31) 라고 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33) 하셨는데 이는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주께서 그 동안 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39-41) 하였다.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말씀은 이사야 6 장에 나와 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는 역사를 기록하는 서기관이요 선지자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는 사람이니 사심과 편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성전과 왕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율법대로 바르게 산 사람이다. 누가 봐도 의인이다. 악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표현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죄를 회개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통해 이사야에게 그동안 죄와 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죄와 악이 무엇일까?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의 말씀을 적용해 볼 때 이사야가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동안 종교 생활을 하면서 선을 쌓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악을 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선한 말을 하지 못하고 율법 아래서 바른 말만 한 것이다. 이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의 신앙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뜻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주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자신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고 악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 후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사 64:6)고 했다.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자기 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사 29:13) 라고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고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했다.
사도 바울도 율법대로 바르게 흠 없이 산 사람이다. 그래서 틀린 것을 보고 지나갈 수 없었다. 덮어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높이 들린 것을 보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이사야처럼 주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께 교만이요 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무슨 말씀인가 하면 자기가 옳다고 하는 의 그래서 남에게 바른 말하고 듣지 아니하면 성내고 무시하고 핍박했던 이 모든 사고들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영광을 환상으로 보든, 꿈으로 보게 하든, 믿음으로 보게 하든, 깨달음으로 알게 하든,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겸손히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체험하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본 결과는 동일하게 자기 의가 악이라는 것을 알고 통회 자복한다는 점이다. 내 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것이다. 하지만 주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모두가 율법 아래에서 자기 의에 머물게 된다. 그 증거는 남을 정죄하는 삶이다. 남을 정죄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는 교만이다. 왜 그런가 하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의 말씀을 보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향해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칭했지만 주님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도무지 자신들은 이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들을 향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불의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에 속한 사람(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은 의를 주장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기 때문에 그들이 반드시 불의한 사람을 정죄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그렇게 쓰임 받게 되어 있다. 우리는 주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의한 사람에 대해서는 세상 법정이 판단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사야처럼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인정할 때 주님은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는 사면 곧 칭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이 비로서 마음에 와 닿게 되는 법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가치는 인간의 의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의로 주어지는 속죄에 이르는 칭의에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신의 모든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신뢰하는 의를 이루기 위해 불의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 싸움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은 칭의의 은총을 외면하는 것이 되어 심판 날에 주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할 것이다.
칭의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칭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의보다 더 나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값싼 칭의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이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여 해를 입힘으로 말미암아 살인, 성폭행, 사기 등등으로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믿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앙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미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해자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스데반처럼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 가해자를 받으시는 것을 전재하기 때문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 등을 비롯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용서를 비는 것이 없다면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의 불이다.
마 5:20-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의 말씀은 살인과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피해자를 먼저 찾아가 화목한 후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 이후에 칭의의 은총이 적용되는 법이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는 속죄의 교리를 이해하지만 속죄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속죄에 대한 경외심은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현장을 육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없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기록하였다. 갈라디아는 예루살렘에서 800마일 이상 떨어진 현대 터키 중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고 분명하게 전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사건이지만, 영의 영역에서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영의 영역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형제의 죄를 덮어주지 않고 정죄하는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다. 만약 형제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비난을 듣고도 진실을 분별하지 못하며 그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데 동참한다면, 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비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셈이 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형제에게 하는 것이 곧 그분께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5:40).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6-38) 하였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진심으로 회개하게 된다. 이러한 죄를 진심으로 회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인정하게 되고, 그분의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는 신비를 알게 된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간절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에 깨어 있게 되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음을 증거하는 표징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칭의의 은혜를 올바르게 전달해야 한다. 우리의 책임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이해, 특히 영혼 구원을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이해를 키우는 영적 훈련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훈련이 확산되고 하나의 운동이 될 때 교회는 마침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