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값싼 칭의론에 영향을 받은 일부 정통 보수주의 목회자들로 인해 속죄의 은혜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으며, 많은 이들이 단지 이론적으로만 알 뿐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그 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속죄 교리를 확고히 정립함으로써 기독교의 본래 위치를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두 속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죄가 어디에 기록되어 있으며, 어떻게 그 죄를 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에 대한 기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예레미야 17:1).
이 말씀을 통해 죄가 마음 판에도, 제단의 뿔에도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죄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주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고 증언합니다(히브리서 7:14).
또한,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면 유다 족속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29).
그리고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된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 참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겉모양의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니라” (로마서 2:28-29).

따라서 영적인 관점에서 “유다의 죄”란 곧 우리의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과 제단의 네 뿔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7장 11절에서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고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도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죄의 방법을 보면, 대제사장은 먼저 송아지와 염소를 죽이고 그 피를 제단의 네 뿔에 바른 후, 피를 일곱 번 뿌려 제단을 성결하게 합니다. 이는 죄의 값이 사망이기 때문에, 생명의 피를 흘리는 것이 죄 지은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다음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염소(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온 백성의 죄를 자복한 후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냅니다. 이는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가 대신 짊어지고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속죄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의 죄 씻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히브리서 10:1-4).

그렇다면 이 그림자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히브리서 10:9-10).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 아사셀: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유월절 양: 고린도전서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 화목제물: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대속물: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따라서 구약의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며,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어떠한가요? 그는 죄가 없으시고 (히 4:15, 요일 3:5, 고후 5:21),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고 (히 9:14, 벧전 1:19),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모욕하는 사람을 향해 욕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벧전 2:22-23). 이렇게 흠 없는 예수님의 피는 어떤 일을 하는가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고 (마 26:28, 엡 1:7), 참된 음료이며 (요 6:53-56), 의롭다 함을 얻게 하고 (롬 5:9),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며 (골 1:20),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고 (히 10:19), 거룩하게 하고 (히 13:12),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히 9:14), 구속함을 얻게 하고 (벧전 1:18-19),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며 (요일 1:7),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계 1:5),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며 (계 5:9), 세마포 옷을 씻어 희게 하고 (계 7:14), 사탄을 이기게 하는 (계 12:11) 등의 일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예수 피의 권세, 피의 능력을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은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나의 범죄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롬 4:25) 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다시 사신 것)은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칭의론”은 예수님의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칭의론은 십자가 신학만 가지고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고, 부활 신학까지 포함해야 칭의론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칭의론을 십자가의 신학으로만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 신학 또는 포스트모던 신학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7) 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고 우리 각 사람의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속죄의 피는 있지만, 부활이 없었다면 그 피를 각 사람에게 뿌릴 대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각 사람의 죄는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피 뿌리는 권세는 누구에게 있는가요?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 주신 것인데, 하나님은 다시 사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대제사장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히 2:17-3:1, 4:14-15, 5:6-10). 이것은 히브리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신앙(믿음)이 무엇인가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후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고, 그리고 승천하여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히 4:14-16, 9:24).

그러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어떻게 피 뿌림의 예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식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피 뿌리는 예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히 11:28). 따라서 믿음으로 하늘 성소에(엡 2:6) 계신 대제사장에게 “저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의 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어디에 자신의 피를 뿌릴까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피)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2, 출 12:7). 왜 마음에 피를 뿌릴까요? 그것은 마음에 죄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렘 17:1).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전 1:2).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뿌린 사람들을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 5:9),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행 20:28),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고전 6:19-20)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따라서 칭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누구의 소유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롬 1:5-6, 벧전 2:9).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의 양심을 뭐라고 하나요? 잘못된 것이고, 악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피 뿌림의 은총을 받으면 그 사람의 양심이 어떻게 될까요? 착한 양심, 선한 양심이 됩니다 (히 10:22, 9:14). 선한 양심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솔직한 고백이며, 그 증거는 내 뜻이 있을 수 없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피 뿌림을 받으면 당신의 뜻대로 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의 은총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피 뿌림을 받은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가 없다면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은총의 수단 곧 기도, 금식, 성경공부, 구제, 성도의 교제 등을 성실히 하고, 악을 피하며, 죄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세례를 받았다 해도 더욱이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며, 성직자라 하더라도 피 뿌림의 은총을 받지 않았으면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피뿌림의 은총을 받은 증거가 있어야만 완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입니다. 그 증거는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며,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있을 수 없고, 자신 안에 성령이 내주 하기 때문에 성령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칭의의 은총에 대한 확증이 없이는 성화의 삶이란 하나의 이상이지 자신과는 관계 없는 것이 됩니다. 다투기 싫지만 자신이 살아있으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때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다투게 됩니다.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칭의의 은총은 죄에서 해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의의 은총을 받지 않으면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노예입니다. 죄가 주장하는 대로 따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화는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칭의 다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제단 뿔에 기록된 죄는 어떻게 될까요? 그림자의 실체를 이루는 어린 양의 번제단은 십자가이고, 십자가 네 뿔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졌기에 단 뿔에 기록된 유다의 죄 곧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들의 죄는 지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잡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 곧 아들의 고난으로 모든 사람의 죄가 용서됐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예수의 피를 각 개인의 마음에 뿌려야 한다는 진리를 떠나 오직 정의와 윤리 등 사회문제를 위한 종교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복음을 외면한 채 정의 실현을 위해 율법으로 죄인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롬 2:1-5, 약 4:11-12).

복음이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며 구원을 기도하면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에 자신의 피를 뿌려 줌으로써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고 주님의 뜻대로 삶을 살겠다고 공통적으로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들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삶(세상의 소금과 빛)이 드러나 세상을 구원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나 복음주의를 표명했던 사람들이 칭의의 은총 없이 성화의 삶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이 율법이 되어 서로 정죄하고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세속적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거기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학의 지평을 연 것이 종교다원주위와 연관된 포스트모던 신학입니다. 그들은 칭의론이 기독교를 부패하게 한 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것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주장하기를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당시 신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고백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보다 더욱 위대하다는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해 창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역시 본래는 하느님의 정의로 인해 의롭게 살다가 순교한 사람들의 집단적인 의미인데 교회가 예수 개인으로 부활을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 예수의 부활의 의미는 신앙공동체의 정의구현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가 구원자라는 고백을 교묘히 부인하고, 예수의 정신대로 우리가 사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안에서 칭의론은 현대인들에게 먹히지 않는 골동품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주의를 표명한 사람들보다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여론을 이용합니다. 더욱이 생태신학을 연구하여 그 공로가 크다 할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조하고 복음주의 노선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이 공공연하게 세계적인 신학의 흐름을 타고 있는 이 때 성서적 칭의론의 정립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을 십자가에서 정복하셨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복음의 핵심 내용인 칭의론이 정확하게 전달되기만 한다면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사탄의 힘은 무력화되고 말 것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거룩하게 된 제단에 닿는 모든 것은 거룩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의 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에 닿는 모든 것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라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닿은 것이니 자신이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칭의의 은총을 받았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거룩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5)고 단호하게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누가 수천 만 불을 준다고 할 때 이웃을 해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까?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할 수 있습니까? 칭의의 은총을 받으면 더 이상 죄가 그를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6-9).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1-25) 라고 했을까요? “탐내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등의 계명을 알기 전에는 그러한 행동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았습니다(롬 7:9). 이것은 내가 살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계명을 알고 나니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죄가 내 안에서 왕노릇하기 때문에 여전히 형제를 판단하게 됩니다. 결국 죄를 범한 것이 되고,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자신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율법이 나를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고 사망으로 이끈 것입니다(롬 7:11).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이 우리에게 사망에 이르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자신이 죄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증거입니다(롬 7:14).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값으로 주고 죄 아래 팔린 나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분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나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성령이 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기 전에는 내가 육신에 속하여 죄의 법을 섬겨왔지만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 다음부터는 내가 성령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 7장은 육신에 속한 크리스찬의 고뇌를 그렸다면, 8장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성령 안에 거하게 됨으로써 승리를 선언한 말씀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요 9:39-41). 그리고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이 내 마음에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대로 말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 예수님의 몸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적 칭의론으로 기독교인들이 기초를 가진다면 기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신뢰받을 것으로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