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강의
이러한 영적 훈련의 9단계가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하고 모든 단계를 마스터하기 위해 훈련에 집중하세요.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한 증거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성서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돕고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고 세울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교회에 이러한 리더를 세우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은 신자들을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가르치고 형성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강력한 도구 역할을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고 온전하게 만드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부족함 없이 온전해지는 영적 성숙으로 이끄는 기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시련을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이는 말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다스리는 능력을 반영하기 때문에 말을 잘하는 것은 영적 성숙과 자제력의 표시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렇게 성경은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수 있도록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관련되어 제시한 성경구절을 개역성경은 완전 또는 온전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헬라어는 모두 τέλειος 이다. 온전 또는 완전으로 번역한 단어들을 새번역, 공동번역, 쉬운성경, 현대어성경, 킹제임스, 바른성경 등은 모두 다 완전으로 번역하여 혼돈을 없앴다. 물론 영어성경은 다 perfect 이다. 성서에 기록된 완전이란 피조물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완전이란 오판하지 않고, 악에게 유혹받지 않으며 전지전능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완전이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완전이다. 이렇게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완전이란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완전을 성경에서 요구하지 않았다.
2.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주님의 명령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러므로” 라고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완전하라는 말씀은 그 앞에 전개된 44절의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완전이란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써 내가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의 말씀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내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예수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예수를 보리라 하느냐”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다. 주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이 머리로 거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씀이기에 제자된 우리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머리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3.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의미와 한계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반문하면서 대부분 사도 바울도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하나 내 속에 악이 있어서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한다고 했는데,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며 죄를 합리화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교훈을 따른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4)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라고 말한 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한 것은 내가 육신에 속해 있으면 죄 아래 팔린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는 말씀을 보면,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는 말씀이 증거하는 것처럼 죄의 종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일을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죄의 종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이 진리를 믿는 사람은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하나 내 속에 악이 있어서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한다”고 말씀한 것은 죄의 종으로 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죄의 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선언했다.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4-10)고 말씀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지식과 능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실수와 과오를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완전이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인데 그 마음에 죄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배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모든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나왔을 때의 과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 할 수 없다.(요일 5:16) 그렇지만 이것까지도 속죄의 피는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해의 결함으로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지식의 결핍이다. 사람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다. 또한 무오나 유혹을 받지 않는 완전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판단의 과오는 실천의 과오를 가져오게 되고, 남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갖게 되어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깨끗하게 된다(요일 1:7). 이러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말은 사랑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이다(고전 13:4-5).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사모하는 사람은 모든 의도가 순수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어린이에게도, 부부간에도, 부자간에도, 교인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목회자 간에도 누구에게나 무례히 대하지 않는다. 성내지 않는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의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성내지 않을 수 있느냐? 아이들이 잘못하면 화내지 않을 수 있느냐?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낸다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남는 경우가 실제로 많이 존재한다. 부부간에 화를 내고 감정이 상하여 이혼까지 가기도 하고, 교인 간에 화를 냄으로 교회를 영원히 떠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작은 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고,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였고,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했다. 그러면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그러면 불의를 보았을 때 분노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방해 되는 것은 사람의 계명과 생각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때때로 성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범한다는 사고는 요한일서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화를 내는 것을 정당화 한다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화내거나 분노하는 것)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모욕하거나 창피를 주는 말)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You fool!)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는 말씀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는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나니”(고후 10:4-5)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기록된 성서의 말씀보다 높아진 생각이나 어떤 이론도 무너져야 한다. 이유를 떠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고 화를 내어 주님의 영광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고 남을 정죄하는 사고의 바탕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과 경험과 신앙적 사고로 보았을 때 상대보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의를 받는 칭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칭의의 은총을 살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