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진단
요한복음 3장 5-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다음 세 가지를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셋째,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먼저 물로 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셨을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여인은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너에게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너는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에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겠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대답을 인정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주님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시면서 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주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 6:63의 말씀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영입니다. 주님이 여인에게 영으로 말씀하셨다면 남편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고전 11:3과 엡 5:23에 의하면,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은 머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머리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로마서 6장 3절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물은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하게 됨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자들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머리 역할을 하던 이전의 삶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지내고,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 되심을 고백하며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영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과 같으신 분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편은 세속적 의미의 남편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 머리 역할을 하시는 분을 뜻합니다.
2.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을 창조하셨습니다. 영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인 사람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각 사람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육을 다스리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영이 죽은 상태나 다름없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잠든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육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의 영을 깨워 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람을 의미하는 단어는 “루하”인데, 성령 역시 “루하”로 표현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통해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고, 바람이 몸에 닿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끼고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이 바람처럼 여러분의 마음에 불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깨어난 영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했던 현상과 유사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술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전에는 육의 본성에 따라 살던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성령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의 삶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로마서 14:17).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란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2장 29절은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본받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평화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살아가듯,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하나님이 보호자이시기에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만약 삶의 목적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사는 데 있다면, 어려움을 만날 때 쉽게 평화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목적은 예수님처럼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습니다. 더불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남은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때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을 때, 환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의 세 번째 특징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보통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대의 경우가 많고, 이런 상황에서 기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시험은 좋지 않은 일이기에 기분을 나쁘게 만듭니다. 그러나 3절과 4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제 삶에 비추어 보면, 과거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내 사명이 영혼을 살리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은 후, 성령께서 내 삶을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일한 상황에서도 기분이 다운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내 상황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입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고, 예수님이 머리이시기 때문에 그 목적이 자연스럽게 영혼 구원으로 정해집니다. 시련은 이러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에서 모난 부분을 깎아내십니다. 만약 이러한 시련을 기쁘게 여기지 못하면, 우리의 인격은 여전히 모난 상태로 남게 됩니다. 그 결과, 영혼을 구원하기는커녕, 도리어 천국 문을 닫아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더 나쁜 상황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뜻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항상 의와 평화와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영과 육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둘이 서로 대적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육이 이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주관하시도록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늘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갈 때, 성령 안에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로 다시 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고백하고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에서 우리의 남편이 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고 믿게 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마치 새 술에 취한 것처럼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의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 시작됩니다. 결국,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남은 생애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영혼 구원에 두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믿음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잘 지켜갈 수 있도록 은혜로 늘 함께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의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