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영적인 눈이 열리면 믿음이 행복의 원천이 되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소경은 신앙의 세계를 배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이 열리면 주님과 동행하며 빛 가운데 살게 되고,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는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부모는 자녀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님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행복은 단계적으로 성숙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진정한 행복은 마태복음 5장 3~12절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한 영혼의 구원에서 발견되며, 이는 온 세상보다 더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3장의 경고를 들어야 하는 사람은 그들 뿐만 아니라 저를 포함하여 여전히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열쇠는 베드로후서 1:5-9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여러분은 믿음에 선을, 선에는 지식을, 지식에는 절제를, 절제에는 인내를, 인내에는 경건을, 경건에는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이 이러한 자질을 점점 더 많이 소유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는 사람은 근시안적이고 소경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려면 믿음에 선을, 선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단계를 자신의 신앙에 적용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영적 수련이 필요합니다.

육체적 수련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있지만, 영적 수련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수련에 합당한 기도는 마태복음 6장 9~13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본받아 각 단계마다 회개와 소망을 담아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기도 수련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칭찬을 받고 영원한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첫번째 영적의 단계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영성이 자라게 하는 수련을 할 것입니다. 영적 수련은 내 영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기도문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수련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방법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 말씀을 주셨는가 묵상하고 자신에 적용하는 작업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묵상한 후 이에 해당하는 강론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자신의 기도문을 작성할 수 있게 됩니다.

영적 수련의 첫 번째 단계

예수님은 왜 나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어떤 사람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천국은 나에게 무엇인가 묵상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어 보세요.

주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란 말씀을 왜 내게 하셨으며, 천국 문을 닫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를 묵상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기록합니다. 일반적으로 “나는 아니지요” 합니다. 하지만 내게도 해당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주께서 지목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육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묵상을 적어 보세요.

주님께서 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는지 묵상해 보세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으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의 말씀에서 가난이란 헬라어로 πτωχός인데 거지 나사로를 가린켜 사용된 단어입니다. πτωχός를 물질의 의미로 사용된 성경구절은 모두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심령의 가난이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고(눅 7:22),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약 2:5).  

주님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청빈생활을 해야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면 따라 올 수 있는 가난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가난이란 자신을 알고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영적으로 비참하고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었고 자기 속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악하고 가증한 것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계 3:17). 자신 안에는 허영, 증오, 시기, 복수, 분노, 악의, 세속에 대한 애착과 욕망 그리고 불친절한 언어 사용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함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이런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는 지옥의 저주에 해당하는 자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3:20). 따라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악한 것 뿐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천국을 은혜로 주십니다. 이 천국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롬 14:17). 의와 화평과 기쁨이란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기 때문에 평화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의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노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천국의 은혜를 계속 누리려면 자신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절대로 가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칭송은 하나님께 귀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칭송을 거부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주장하지만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언급된 것처럼, 이들은 천국의 문을 닫아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예수님을 알고 따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였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의 은 신전을 만드는 데메트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사업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정적 손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다른 장인들을 모아놓고 “우리는 이 사업을 통해 부를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울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은 전혀 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무역이 좋은 이름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전이 불신을 받고 그녀의 위엄이 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데메트리우스는 자신의 “부유한 생활 방식”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부유한 생활 방식”이란 그리스어 유포리아(εὐπορία)입니다. 흥미롭게도 유포리아라는 단어의 숫자 값을 더하면 총 666이 됩니다. 이것은 사탄이 부를 이용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헬라어는 알파벳에 수 값을 가진다. α=1 β=2 γ=3 δ=4 ε=5 ζ=7 η=8 θ=9 ι=10 κ=20 λ=30 μ=40 ν=50 ξ=60 ο=70 π=80 ρ=100 σ(s)=200 τ=300 υ=400 φ=500 χ=600 ψ=700 ω=800. 그런데 εὐπορία (5+400+80+70+100+10+1=666)의 알파벳 수치를 더하면 666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주인을 미워하고 다른 한 주인을 사랑하거나, 한 주인에게 헌신하고 다른 한 주인을 경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6:24).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맘몬을 섬기지 않고 우리 주 예수님만 섬길 수 있을까요? 주님은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숨기고 기쁨으로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습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마태복음 13:44-46).

이 구절에 따르면 천국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만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도 “나를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전토나 아비나 어미나 처자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백 배나 받고 영생을 상속받으리라”(마 1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팔거나 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우리는 주님께 “내가 관리해 온 집, 형제, 자매, 부모, 자녀, 밭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 그것들을 주님께 돌려드립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소리 내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야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롭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서 10:10). 또한 언약은 일단 비준되면 아무도 그것을 제하거나 더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3:15).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원을 그분의 뜻에 따라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신실함(충성)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악한 욕망으로 인한 세상의 부패에서 벗어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순수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상의 부패를 피하고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단계를 따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보배로운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요 3:16) 하나님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갖고 모든 시험을 다 받으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고후 5:15)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사망에 매여 썩어질 수 없었고, 성경대로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 곧 대제사장이 되셨다.(행 2:36)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을 자신의 피값을 주고 사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보증으로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자녀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계획하셨습니다.(롬 10:9)

이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이 되고 딸이 되리라”(고린도후서 6:18)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주님을 영접해야 하고 동시에 주님도 나를 영접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나를 알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이라는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이 열려 빛을 보고 빛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을 때 우리는 주님과 교제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과 딸이 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진정으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첫 번째 단계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제 이에 합당한 자신의 기도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매일 자신의 것이 되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Quiz 1: 1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1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두 번째 단계

우리는 두번째 영성의 단계인 애통하는 자의 영성을 자라게 하는 수련을 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영성이 형성이 되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 즉 그가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육의 본성은 이러한 분별하는 일에 무관심 하게 하여 영혼구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래서 믿음 위에 덕을 쌓는 수련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수련을 통하여 애통하는 자의 영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합당한 기도문을 작성함으로써 2단계 수련을 마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나는 정확히 무엇을 애통해야 할까요? 나는 현재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나요? 이 말씀을 묵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또한 누가복음 23:28을 묵상해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 대한 묵상도 기록해 보세요.

이 구절은 해당 번역본의 기반이 되는 원문에 없기 때문에 개역성경이나 NIV나 ESV 같은 버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KJV, WEB, NLT 및 NASB와 같은 버전에는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위선자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 가식으로 긴 기도를 하므로 더 큰 정죄를 받을 것이요.” (마가복음 12:40; 누가복음 20:47)
주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묵상하고, 주님께서 마음에 새기신 생각과 메시지를 적어 보세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구원받는 믿음에 더해야 할 영혼구원과 관련하여 덕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세요.

주님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영혼 구원과 관련된 기도를 내게 주신 이유를 묵상해 보세요. 이 기도를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으세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1단계인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그 다음 단계에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2단계인 애통하는 단계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애통해야 하는지 분명한 가치관이 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내 안에서 애통하는 소리를 믿음으로 들을 수 있어야 나도 성령의 감동에 따라 애통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라고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무엇 때문에 애통해야 할까요? 첫째, 애통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사라진 줄 알았던 죄가 다시 떠오르거나 시련과 고통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의 위로를 거부하고 첫 단계에서 굳건히 다진 믿음, 즉 주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한다면 어떤 시련이나 고통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의 눈물로 찬양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로마서 8:26-39). 둘째, 애통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에 직면한 형제를 위해 눈물로 중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다른 사람의 회심을 위한 우리의 탄식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나이다”(시편 119:136)라고 말하고 있으며, 예레미야는 “내 영혼이 너희 교만 때문에 은밀히 울겠나이다”(예레미야 13:15-17)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에 직면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슬퍼하며 기도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너는 상한 마음과 쓰라린 슬픔으로 탄식하라. 그리고 사람들이 ‘왜 탄식하느냐’고 물으면 ‘다가오는 소식 때문에…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라고 대답하라.”(에스겔 21:6-7) 주권자 주님께서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자신을 위해 우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누가복음 23: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애통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음의 빛 안에서 살며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를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대개 “내버려 두라, 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는 식으로 반응하거나 “네 믿음이나 걱정해라”며 조롱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에 이끌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주장하며 당신을 비난하거나, 당신이 자신의 신앙을 무시하고 자신을 가르치려 한다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기도 없이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사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복음을 반대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대적할 것입니다.

제 육신의 본성 역시 이런 종류의 애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영적으로 독실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긴 기도를 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 과시하려고 긴 기도를 하는 자들이라. 이 사람들은 가장 심한 벌을 받을 것이다”(막 12:40; 눅 20:4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부는 고아처럼 경제적 수단이 부족하여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영적으로 과부는 사악하고 더럽고 완전히 부패한 사람, 즉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과부의 집을 삼킨다”는 것은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고 자신의 세상적인 목적만을 위해 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탄은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무감각의 깊은 잠에 빠지게 합니다. 사탄은 내가 세상과 친구가 되고 세상의 것을 사랑하도록 유혹하여 나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듭니다(약 4:4, 요일 2:15).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빛 가운데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구속의 은혜로부터 나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요일 1:7).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받을 심판이 가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 단계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덕을 더하는 것은 성화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받은 것처럼 덕도 은혜로 받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성화 과정의 모든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따르면, 덕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덕을 선포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때 어둠 속에 거하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복음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가 빛 가운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빛이 마음에 비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설명된 대로 이 세상의 신 곧 사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 결과 빛이 비춰지더라도 가려진 마음에는 빛이 비출 수 없습니다.

빛이 사람들의 마음을 비춰지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5절은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을 위해 여러분의 종인 우리 자신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여러분의 종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종이 되었고(고전 9:19), “내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종으로서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 다가갈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마음을 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게 하사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취게 하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고 기록된 대로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다른 사람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추라고 명하시고, 그들의 마음이 열리면 그 안에서 그분의 빛을 비추십니다. 동시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그들 안에 있는 어둠의 영을 몰아내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신앙에 더해야 할 덕목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종의 모습으로 다가가 그들이 복음의 빛으로 들어오도록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죄로 죽을 것이지만, 주님은 그들의 피에 대해 나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에스겔 3:18).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저는 불신자와 세상 사람들에게 종으로서 다가가서 성령께서 애통하는 것처럼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애통한 기도에 대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 “나는 나 자신”(출 3:14)이신 창조주이자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거룩함은 이 세상의 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변화되고 성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로마서 12:2).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심판에서 구속하셨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부르셨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벧전 1:15~19). 이 놀라운 미덕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동일한 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의 순종에 사로잡히도록,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세로 온 인류를 다스리는 나라가 오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마 12:28)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임하시고 어둠의 영이 그들로부터 쫓겨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효과적으로 기도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종의 모습으로 다가갈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덕을 뜻하는 그리스어 ἀρέτη(아레테)가 용기로 번역될 수 있는 이유는 적을 물리치려면 큰 담대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애통하는 기도는 형제자매를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드리는 영적인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그들의 마음에 비추는 것을 방해하는 이 세상의 영을 몰아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우리가 종으로서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러나 종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므로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용기는 우리가 믿음에 더해야 할 덕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들은 빛을 보고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성령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신음에 동참하는 애통하는 기도를 부지런히 수련해야 합니다. 이 수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매일 해야 하는 수련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Quiz 1: 2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2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세 번째 단계

우리는 영적 성장의 세 번째 단계인 온유한 자의 영성을 형성하는 영적 수련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번 묵상은 팔복(마태복음 5:3-12), 팔화(마태복음 23:13-36), 하나님의 성품 8가지 특성(베드로후서 1:5-7),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의 네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이 네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보완적이므로 함께 묵상하면 온유한 사람의 영성을 형성하는 수련에 효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축복의 원천이시므로 팔복은 그분의 마음과 성품을 반영합니다. 왜 주님은 저에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내게 기업으로 주실 땅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들을 묵상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위선자들이여! 너희는 한 사람의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가로질러 여행하고, 그가 개종자가 되면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묵상하고, 주님께서 마음에 떠오르는 말씀과 생각을 적어 보세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여기에서 덕에 지식을 더하라 했는데 어떤 지식을 말씀한 것인가? 빌 3:5-11 묵상하면서 내게 더해야 할 지식이 무엇인지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합니다.
빌 3:5-11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주님은 어떤 종류의 지식을 언급하고 계신가요? 당신의 삶에 어떤 지식을 더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께서 왜 이런 기도를 부탁하시는지 묵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세번째 영적 단계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온유의 단계는 애통의 단계를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불로 향하는 영혼들을 위해 울며 기도하는 자에게 온유한 마음을 허락하셔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심으로 우리가 목이 뻣뻣하고 끊임없이 반항할 때에도 아버지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십니다(히브리서 5:7; 로마서 8:34). 모세 역시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하나님과 자신에게 반역하는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형제자매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내 백성 곧 동족을 위하여 나 자신도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를 원하노라”(로마서 9:3)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 모세, 바울처럼 온유한 자로 다가설 수 있어야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됩니다.

온유란 극단을 피함으로써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의 어떤 불합리한 상황 아래서도 분노하거나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인해 균형을 잃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인내하며 평정을 갖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는 자족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런데 이 온유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사람에게 형성되는 영성입니다 .

주님의 말씀은 영혼구원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업으로 받을 땅은 물질적인 땅을 의미하기 보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의미한다. 그 근거로 좋은 땅은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하는 자라 하였고(마 13:23, 눅 8:15),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롬 9:17)의 말씀을 보아도 땅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을 의미한다. 좋은 마음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되어진다. 성령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다(겔 36:26-27).

예수님은 육에 속한 나의 본성을 향해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육의 본성은 교인을 얻으면 내 신앙을 본보이고 본받게 하는데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을 본보이는 것입니다(요일 2:15-16, 약 4:4).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4:10). 이것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가 본을 보이는 것은 교회 안에서 더 높은 직분과 명예를 얻기 위해 때로는 당을 짓고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입니다(유 1:19). 그러면서 형제 자매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온유하면 사람들로부터 이용만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맞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련을 통해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영성을 키웁니다. 이러한 영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종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형제자매의 구원을 위해 슬퍼하고 기도하며 종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 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비하할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 안에서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는 종종 우리의 얼굴에 나타나고, 결국 형제자매의 마음을 닫아 그들로 하여금 복음에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상속받지 못하고 구원하도록 부름받은 영혼을 잃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해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가져야 할 지식이란 예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배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했습니다. 지식에는 듣고 배워서 아는 지식이 있고 만남을 통해 서로 사귐으로써 알게 되는 지식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예수님도 나를 안다고 해야 비로서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또는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 할 때에 주님은 밝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 말씀을 보면,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나를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여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도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과 교제하려면 우리도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합니다(요일 1:6~7). 어둠 속에서 걸으면서 그리스도와 교제한다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면서도 교회에 출석하고, 설교를 듣고,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강력한 설교를 하고 설득력 있는 성경 공부를 인도할 수도 있지만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은 부재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2:4-5).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으로 성장하려면 그리스도의 빛과 교제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깁니다. 더욱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탁월한 가치 때문이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함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죽음과 같이 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함이니”(빌립보서 3:7-11).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은 종종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깊고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어리석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우 지혜롭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여러분은 강합니다! 당신은 영광을 받고 우리는 불명예를 당합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는 배고프고 목마르며 누더기 옷을 입고 잔인한 대우를 받고 노숙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열심히 일합니다. 저주를 받으면 축복하고, 핍박을 받으면 견디고, 비방을 받으면 친절하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 땅의 쓰레기, 세상의 쓰레기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4:10~13). 이것이 바로 종의 모습이며, 십자가에 뿌리를 둔 믿음이며,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지혜롭고, 강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려고 열심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이런 열심은 참된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의에 대해 무지하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합니다(로마서 10:2-3).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리 잡으면 필연적으로 반대 견해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과 분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장 20~21절은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낳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도덕적 더러움과 만연해 있는 악을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겨진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면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싸움과 분노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데서 비롯되며, 땅을 상속받는 온유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온유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주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 기도는 수동적인 체념의 기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수행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뻐하고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우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온전히 일치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좌절하고 화를 냅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면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온유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들을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어둠에서 구원하고 빛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온유로 형제 자매를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그들을 구원하여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여기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함은 그들의 마음을 옥토로 개간하는 일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도록 수련해야 할 것입니다(벧전 4:2).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종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문제는 애통하며 형제 자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종의 자세를 갖고 다가섰는데도 불구하고 형제 자매가 악으로 대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입니다”라고 기도하기 전에는 내 마음이 상해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것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성령께 내 마음을 의존하는 기도입니다. 때로는 내가 모욕을 당하고 비천에 처하고 만물의 찌끼처럼 취급을 당합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겪어야 할 해산의 수고라면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때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유한 모습을 잃지 않게 되면 상대의 마음을 열고 옥토로 개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빛 가운데 삶으로써 온유하신 예수님과 교제하며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기도함으로써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온유한 모습을 잃지 않도록 도우시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 영혼을 얻게 된다는 영적인 비밀을 늘 기억하면서 우리는 온유한 자의 단계의 수련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3 단계 수련의 내용을 기도문으로 작성하여 주님께 올릴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온유한 자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로 성령께서 온유라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Quiz 1: 3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3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운동의 네 번째 단계

우리는 영적 성장의 네 번째 단계인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에 초점을 맞춘 영적 수련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적 본성은 종종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를 갈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에 절제를 더하는 수련을 통해 매일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반드시 완수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 단계의 일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문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련을 포함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름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묵상하고 묵상하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들아,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누구든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맹세에 구속된다’고 말하는 자들아, 화 있을진저. 이 눈먼 바보들아! 금과 금을 신성하게 만드는 성전 중 어느 것이 더 큰가? 너희는 또한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누구든지 그 위에 있는 선물로 맹세하면 맹세에 구속된다’고 말한다. 이 눈먼 자들아! 선물과 선물을 신성하게 만드는 제단 중 어느 것이 더 큰가? 그러므로 제단에 맹세하는 사람은 제단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맹세하는 사람은 성전과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맹세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유를 묵상하고 묵상하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세요.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지식에 어떤 절제를 더해야 하는지 묵상하고, 명상 중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의 의미와 주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부르셨는지 묵상하고, 묵상 중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우리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름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는 세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2)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 (3) 은혜의 수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종교의 껍데기에 불과하며 의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장하고,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생명을 누리며, 그분과 한 몸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하며,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고, 빛 가운데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를 갈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의 내용입니다.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은 그 필요를 채워야 하듯이, 이 영적 배고픔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특히 영혼의 세균과 같은 건강하지 못한 욕망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영혼구원과 관련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함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배고프고 목말라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마음이 열린 전도 대상자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갈급해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에게 값을 요구하지 않고 주시는 은혜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갈망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물질과 시간과 건강을 최대한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사용해야 할 청지기입니다.

하지만 나의 육의 본성은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에는 관심이 없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생활에서 오직 내 의를 세우기 위해 배고파 하고 갈급해 합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내 본성은 내 의를 세우기 위해 정통성을 주장하고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전통과 법으로 사람들을 법 아래 있게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3:16에 보면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맹세는 자기보다 큰 자를 가리켜 하는 것인데 그러한 가르침은 돈이 인간보다도, 성전보다도, 하나님보다도 크다고 가르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교훈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육에 속한 나는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그것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내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 것입니다(롬 10:2-3) . 오직 세상 것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또한 육의 본성을 따르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2-9).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어로 “전통”이라는 단어는 παράδοσις(파라도시스)이며, 글자의 숫자 값을 더하면 666(80+1+100+1+4+70+200+10+200=666)이 됩니다. (α=1, β=2, γ=3, δ=4, ε=5, ζ=7, η=8, θ=9, ι=10, κ=20, λ=30, μ=40, ν=50, ξ=60, ο=70, π=80, ρ=100, σ(s)=200, τ=300, υ=400, φ=500, χ=600, ψ=700, ω=800).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풍족한 생활’을 의미하는 εὐπορία(유포리아)와 ‘전통’을 의미하는 παράδοσις(파라도시스)에 모두 짐승의 수가 들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전통은 인간의 오류로 인해 오염될 수 있으며, 성경은 전통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전통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변하지 않는 진리와 사회 및 시대와의 관련성 사이에서 균형 잡힌 이해를 추구하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가르치며, 영적 수련의 네 번째 단계에서 개발해야 할 필수 요소는 자기 통제(ἐγκράτεια, 자제력), 즉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면 먼저 기도의 수련을 통해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말은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고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말은 하나님의 의를 가리고 사람들을 어둠으로 인도할 뿐입니다(잠언 10:11). 성경은 우리의 말이 독이 될 수도 있고 생수가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이웃과 싸우거나 화를 내는 원인을 보면 내 신앙이 바르고 옳다는 확신을 갖고 설득하려고 하지만 나와 또는 내가 속한 그룹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낳지 못한다”(야고보서 1:20)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인지 신중하게 분별하고 “듣기는 속히 하고 말은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의 명령에 따라 자제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관된 절제하는 수련이 바로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지는 방법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욕망을 절제해야 합니다. 첫사람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한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함으로써 사망을 가져왔다. 에서는 배고픔을 절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장자권을 팔았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자권이란 보이는 팥죽 한그릇보다 하찬케 보이는 법입니다. 결국 에서에게 망령된 자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습니다. 또한 십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려는 법들입니다. 따라서 내 욕망을 절제할 때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세워진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의와 내 의를 바꾸는 망령된 자에 속하지 않기 위해 절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는 기도함으로써 임하는 성령에 의해서만 자기 의를 이루고자 하는 말이나 욕망을 절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양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요 4:34) 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구해야 할 양식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뜻은 나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옮기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 내가 매일 구해야 할 일용할 양식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양식을 구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있어야 할 것은 다 아신다 하였고, 그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마 6:31-32).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문제는 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삶이 습관화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절제해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따라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만이 절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절제를 더하라는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은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는 생명과 경건과 관련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성찬식도 포함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선물로 주시므로 내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매일 저녁을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부활의 몸을 입고 주님을 대면하게 될 영원을 고대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Quiz 1: 4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4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다섯 번째 단계

우리는 영적 수련 다섯 번째 단계인 긍휼히 여기는 영적 수련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육신의 본성도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영혼 구원을 위해 절제에 인내를 더해야 하는 이유도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문을 작성하며 영적 수련의 다섯 번째 단계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지 묵상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긍휼한 마음을 가졌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생각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묵상을 적어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주셨는지 묵상하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울림을 주는 생각을 적어봅니다.

“절제에 인내를…더하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절제에 왜 인내를 더하라 했는가에 대해 묵상하고 혹시 인내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기억을 더듬어 본 후 어리석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주님 때문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라는 기도를 우리 주님께서 왜 나에게 가르쳐 주셨는가를 묵상하고 떠오른 생각을적어봅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약 2:13). 그리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형제에게 그렇게 탕감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탕감에 대한 비유의 결론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만 달란트 탕감의 말씀은 우리가 긍휼한 마음을 갖고 형제를 용서할 때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생명의 길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면 할 수록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이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긍휼(자비)한 마음은 고전 13장에 잘 표현되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나의 육의 본성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신앙의 외적인 모습인 박하와 회향과 근채(mint, cummin, dill)와 같이 아주 작은 것까지도 십일조를 하는가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기를 보면 한편으로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에서 본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런 신앙의 외적인 모습을 가지고 교인들의 믿음을 평가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정의와 긍휼과 신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역사상 정의를 내세우지 않은 정권이나 종교는 없습니다. 육의 본성을 숨기고 일반적으로 좋은 소리로만 포장합니다. 눈먼 대중과 교인들은 이렇게 작은 것 곧 하루살이까지 걸러내는 것을 보고 나를 신뢰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의 육의 본성을 정확하게 보시고 낙타를 삼키는 위선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의와 긍휼과 신의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3:23-24).

이에 대해 우리는 평화의 왕인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교회나 가정에서 여전히 불화가 일어나고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현대의 교회는 기독교의 비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서로 분노와 분쟁과 악의와 신랄한 언동으로 충돌하고 적대관계를 만듦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을 구원하기는 커녕 서로 지옥으로 끌고 가며, 교회는 성도의 피에 취해 있는 음녀 바벨론과 다른 바 없다 할 것입니다. 사탄은 억울함과 보복심을 부추기고, 세상은 강해야 산다는 신념을 주면서 자기를 대적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게 합니다. 용서하면 또 대적할 것이라 하며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미움으로 채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깨끗한 물을 마시려고 정수기를 놓습니다.핵심 부품은 필터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패한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인데 이것을 거르기 위해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원하며 기도할 때 주님으로부터 긍휼이라는 필터를 받습니다. 믿음만 있고 긍휼이라는 필터가 없으면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분노와 함께 입으로 다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필터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죽이는 말은 거르고 오직 깨끗하고 생명을 주는 말만 하는 기능을 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실현케 합니다. 하지만 수 많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마음의 상처로 인해 필터가 찢어졌음을 실감합니다. 너그럽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을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롬 11:32)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 예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다는 말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예수를 핍박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도 긍휼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그에게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하여 빛을 비춰주시고 빛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형제자매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옮기기까지는 하나님처럼 긍휼함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까지는 혼미케 하는 영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다 세속적이고 신령한 삶에 대하여 반항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오래 참으로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주님으로부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으로 대한다 할지라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며 복음의 빛을 계속 비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수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이 말씀을 보면 나의 모든 시험과 시련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온전하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주님은 나로 하여금 성령으로 말미암은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란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을 보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 탕감의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와 닿게 하기 위해 상처를 주는 사람을 늘 우리 옆에 존재하게 하십니다. 이들은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지만 용서해야 할 대상이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혔으며 또 계속 입히고 있다면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만 달란트 빚에 비교하면 백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기도하며 마음에 기록된 용서의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인한 탕감이 얼마나 값지고 놀라운지 사람들이 내게 준 상처가 크면 클 수록 정비례하여 마음에 점점 깊이 와 닿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고 범사에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죄란 빚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하여 준다”는 ἀφίημι(aphie-mi)의 의미는 탕감해 주고 빚이 없는 것처럼 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 주신 것처럼 남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형제를 탕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빚진 일만 달란트는 그대로 있게 되어 하나님께서 내게 빚을 갚으라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가 내게 필요 없다면 남을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용서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에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면서 원수까지 용서를 실현하심으로써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기억하는 기도가 절제에 더해야 할 인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현실로 부딪쳤을 때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의 수련을 할 때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으로 우리는 인내하게 되고 마침내 정의와 긍휼과 신의가 자신의 삶에 열매로 남게 되어 긍휼히 여기는 자의 단계를 넘을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Quiz 1: 5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5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여섯 번째 단계

우리는 여섯번째 영성의 단계인 마음이 청결한 자의 영성을 형성하는 수련을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의 본성은 항상 겉을 깨끗이 하고 거룩한 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이 분명한 우리는 뭇사람들에게 경건의 본을 보임으로써 우리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이 여섯 번째 단계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제거하여 마음이 깨끗해지도록 기도문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구절을 적용하면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을 본다는 약속은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러한 생각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묵상이 있으면 적어 보세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주님께서 이 구절을 주신 이유를 묵상하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왜 나에게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 했는가 그리고 내게 더해야 할 경건은 무엇인가를 묵상하고 마음에 와 닿는 생각을 적어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를 묵상해 보세요. 나는 이 기도를 얼마나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영적 수련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팔복과 팔화 그리고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는 내용과 주기도문을 가지고 영성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성수련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 없으면 맹인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벧후 1:5-8). 영성 지도자가 맹인이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마 15:14).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에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눈을 주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 마음의 눈을 열어주어 영성 세계를 알게 하십니다(엡 1:17-18).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에서 “본다”라는 οραω(horao-)는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경험하고, 깨닫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입니다(렘 17:9). 그러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하게 되려면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씻음 받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영성을 수련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그 마음에 탐욕이나 분노나 음란한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는 말씀과 관련한 내적 부정도 없고,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며, 이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자신의 머리로도 맹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예 또는 아니오 일 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믿음으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혜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지탱하시는 것을 봅니다. 또한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분과 친구처럼 대화합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시고, 필요를 공급하시며, 머리털 하나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그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지혜와 자비를 인식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은밀한 기도를 할 때, 말씀을 공부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성찬을 받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나의 육의 본성은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5-26) 하셨고, 이와 병행구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40-41)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비밀에 대하여 예수님은 구제를 말씀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제는 초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웨슬리는 돈의 사용에 있어 첫째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모으고, 둘째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고, 셋째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나누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셋째 것이 무시되면 이전보다 두배 이상으로 지옥의 자식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전 설교에서 인류의 궁핍을 구제할 돈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수입의1/10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교도로 만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영성 수련 첫 단계에서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언약함으로써 청지기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지만 맘몬(mammon)은 떠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마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나의 삶에서 구제는 내 마음에 자리 잡은 맘몬을 청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청결한 자가 되기 위해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 경건에 대한 말씀을 보면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느니라”(벧후 2:5-6) 그리고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15)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약 1:26-27에 의하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아 주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경건의 속성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속성은 선한 말과 구제입니다.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는 명령은 경건에 이르러야만 세상의 부패에서 벗어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필수적입니다. 경건을 이루려면 경건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타고난 기질이라고 변명하지 말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으로 변화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은 옛 자아, 즉 육신의 본성에 속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영적 수련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본성을 버리는 연습을 포함합니다. 변화하고 싶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성령께서 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성품을 변화시키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불신자들은 육신에 속한 본성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지도 않고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매일 육신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마음이 빛을 발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지 않거나 기도와 성령에 대한 의존을 통해 영적 수련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면 소돔과 같은 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 머물러 있으면 필연적으로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른쪽 눈처럼 소중하지만 불순한 욕망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끊어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른손처럼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부정한 생각으로 이끈다면 그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것이 쾌락이든, 소유물이든, 심지어 친구이든, 우리는 그런 것들과 우리의 영혼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또는 영적 지도자와 상의하여 내려야 합니다.

마음이 순수해지려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까지 개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6:9). 믿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직 그분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25)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20)에서 부자들은 겉으로는 종교적이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주님보다 맘몬을 더 의지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평안은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맘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재물에 집착하는 죄를 회개하는 참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주님의 명령대로 자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자선을 지속적이고 진지하게 실천하지 못한다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는 자신의 죄를 분명히 이해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맘몬의 유혹에서 벗어나 마음이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구제가 우리 마음을 깨끗케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속죄의 은총에 반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속죄의 은총은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씻어 성령이 우리 마음에 거하게 하시는 은총이고, 구제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세상 사랑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하는 회개는 우리의 믿음과 서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말과 행동에 고착된 죄를 느끼는 것이며, 믿음은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모든 성정과 말과 행동이 아직도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느끼는 것이며, 믿음은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돌보시고 정죄와 형벌을 다른 데로 돌리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안에는 아무 힘도 없음을 느끼고, 믿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주님 없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믿음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회개로 인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어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 환경을 사용합니다. 물질의 피해를 입히는 원수를 보내고, 물질 때문에 수 많은 시험도 받게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면 자기에게 물질로 피해를 입힌 사람을 원수처럼 대하기 마련인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는 그런 시련과 시험을 통해 내 안에 탐욕으로 부패한 것들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재물이란 하늘 창고에 쌓아둔 것만이 도둑을 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오히려 정결하게 하는 대속의 은혜를 찬송하고,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하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르는 수련의 기회로 삼게 됩니다. 이러한 수련을 통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이 청결한 자의 단계를 넘게 하시고 다음 단계에 오르게 하신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Quiz 1: 6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6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일곱 번째 단계


우리는 영적 수련의 일곱번째 단계인 화평케 하는 자의 영성을 형성하는 수련을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의 본성은 불화하여 일치를 깨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하는 수련을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한 후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문을 작성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 이 메시지를 주신 이유를 묵상하고,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라는 말씀을 주님은 왜 내게 말씀하셨는가 묵상하고 마음에 와 닿은 생각을 적어보세요.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서 내 형제는 누구이며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는 말씀은 내게 어떤 말씀인가 묵상하고 마음에 와 닿는 생각을 적어보세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는 기도를 주님께서 왜 나에게 가르쳐 주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언제 시험에 들고 또 들기 쉬운가? 이에 대하여 묵상하고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세요.

우리가 영적 수련에서 추구하는 축복(μακάριος)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수행의 각 단계는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오늘은 팔복에 나오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εἰρηνοποιός, 에이레노포이오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되었으며 “평화”(εἰρήνη, 에이레네)와 “만들다”(ποιέω, 포이에오)의 합성어입니다. 맏아들이신 예수님(로마서 8:29, 히브리서 2:11, 17)처럼 어디를 가든지 형제자매 사이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평화(εἰρήνη)를 만들기 위해서는 화해(καταλλάγη, 카탈라게)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적대감의 담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 이를 통해 그분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에베소서 2:13-14). 그리고 우리에게 화해의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왔도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해의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그들의 허물을 그들에게 불리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화해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맡기셨느니라”(고후 5:17-19).

따라서 우리가 형제들과 화해의 사역을 수행하려면 주님이 하신 것처럼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대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를 통해 성령께서 화해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과 화평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성령은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로마서 8:14, 16). 화평케 하는 사람은 분쟁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지옥의 불이 붙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미 불이 붙었다면 불이 번지기 전에 불을 끄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피스메이커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때문에 다른 신념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논쟁이나 싸움을 벌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너’의 관계처럼 인격적인 관계와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처럼 비인격적인 관계의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합니다. 후자는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거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물건이 아닌 인격적인 ‘나와 너’의 관계에서 동등하게 대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나는 더 이상 여러분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요한복음 15:15),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진정한 피스메이커는 다른 사람을 “그것”이 아닌 “당신”으로 봅니다. 예를 들어, 결혼 생활에서 이혼은 평등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무너질 때 종종 발생합니다. 자신의 욕구 충족에 기반한 관계는 비인격적인 관계가 되고, 욕구가 사라지면 관계는 종종 끝납니다.

교회는 비인격적인 ‘나와 그것’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평화와 화해의 관계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됩니다. ‘나와 너’의 관계에는 나이, 성별, 재산, 사회적 지위의 구분이 없습니다.

‘나와 너’라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속임수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취급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위선과 거짓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나와 너’의 관계에 있어야 할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파벌을 형성하기를 좋아하는 육신의 본성은 종종 교회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만듭니다. 이런 관계는 경건과 거룩함으로 위장되어 영적으로 눈먼 자들이 진리를 분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내 육신의 본성 안에는 위선과 불법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7-28).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반드시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분열을 일으키고 핑계와 방해로 신자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고 말씀합니다. 사탄은 육에 속한 나를 통하여 동역자나 교인 사이에 상처를 내고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나의 육의 본성은 율법에 매여 형제의 죄를 누설하고 서로 싸우게 하여 화평을 깨는 일을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해야 합니다. 형제 우애로 번역된 단어는 φιλαδελφία(philadelphia)입니다. 벧후 1:7에 “형제 우애(brotherly affection, brotherly kindness)에 사랑(charity, love)을 더하라” 했습니다. 따라서 φιλαδελφία(필라델피아)는 ἀγάπη(agape-아가페)를 향해 나가는 전 단계입니다. φιλαδελφία(필라델피아)는 육체의 혈육을 이루는 형제의 우애를 말하기도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가족이 된 교인간의 사랑을 표시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마12:50). 따라서 형제 우애란 교회에서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평신도가 형제 우애까지 이르려면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의 영성이 바탕을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 우애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14:13)고 했습니다.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하라는 말씀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합된 존재입니다. 몸의 지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 마디로 연결되어 있고 다른 지체를 서로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서로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고 인정할 때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없습니다. 서로는 소중하고 귀할 뿐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 세속적인 사람이나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은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를 잘 아는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여 평화로운 ‘나와 너’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유혹에 빠지는 사람의 흔한 징후는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나와 너”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한 지체가 유혹과 시련에 직면하면 다른 지체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형제나 자매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방문하고, 조언을 제공하는 것은 형제우애의 표현입니다. 형제우애를 통해 화평케 하는 자로 성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영적 유아기에서 성숙으로 성장하는 것은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증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7단계인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그것이 성령의 도움이 없이 나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악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겸손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형제간에 평화를 이루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게 되는 영성이 형성되어 형제들에게 본을 보일 수 있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화평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Quiz 1: 7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7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여덟 번째 단계



우리는 여덟번째 영적 수련의 단계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영성을 형성하는 수련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본성은 박해를 받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고상하게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수련을 함으로써 악에게 지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기도문을 작성하도록 돕고자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는지 묵상해 보세요. 이 묵상 중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적어보세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이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적용해 보고, 마 5:10의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말씀과 마 23:33 지옥의 판결에 대하여 비교하면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내게 말씀하셨는가 묵상하고 마음에 와 닿은 생각을 적어 보세요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형제우애에 더해져야 하는 사랑에 대해 묵상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적어 보세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우리 주님께서 왜 나에게 가르쳐 주셨는가에대하여 묵상하고 떠오른 생각을적어 보세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영적 수련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의 단계입니다.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 하여 핍박을 받았다(요 7:7).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세상 일을 악하다 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가까운 형제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요 15:20) 하면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 했습니다. 따라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필연적인 핍박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육에 속한 자가 성령에 속한 자를 핍박합니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하였고,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3-14)고 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성령을 따라 난 자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핍박받기 마련입니다.

핍박의 이유는 종종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고, 즐거움이 방해받고, 자신의 신앙에 정죄를 받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세상과의 우정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친구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등 세상과 친구가 아닌 사람들은 종종 광신자로 분류되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특히 세상의 영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맹렬히 거부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은 온갖 방법으로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은 남을 밟고 올라서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사람들을 찬양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와 대조를 이룹니다.

나의 육에 속한 본성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에 참여하지 않는 영적 맹인입니다. 그리고 나의 육의 본성은 결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육의 본성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9-33)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육에 속한 나의 본성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일에만 열심입니다. 그렇게 하는 의도는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신앙을 이어받자는 것인데 실상은 그것보다는 그들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하고 나도 은근히 그들과 같은 의인인 것처럼 드러내려는 위선이기 때문에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면하겠느냐고 주님은 반문하셨습니다. 나도 John Wesley, Martin Luther, Jean Calvin, John Smyth를 비롯하여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사람은 아닌가 숙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에 이르기 위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실천에 옮기고자 각 단계에 맞는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여기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체험한 사랑을 증거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하였고,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없으면 내가 하는 종교적인 일과 선행들은 내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명시하기를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모하고 힘써야 할 것은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그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은  이런 것을 사랑하지 않고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의 상품은 대부분 필요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런 물건을 사고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갖고 싶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 되어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맡겨준 재물을 영혼 구원을 위해 구제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 그것을 보는 이로 하여금 생명의 빛을 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때 반드시 믿는다는 형제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영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φιλαδελφία(형제우애)에 ἀγάπη(사랑)를 더해야 합니다. 필라델피아와 아가페는 우리 말로 사랑입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교인간의 우애로 “나와 너”의 동등한 관계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등한 관계로 대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는데 여기에 아가페를 더하라 했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할 때 그 사랑입니다. 그 성격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는 말씀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악에서 구해 달라는 것은 내가 악을 행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에게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이 증거되어야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준 사람들에게 세상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이 본을 보인다면 그들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으로 구원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악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아래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되면 악에 빠지게 됩니다. 악에 빠진 증상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엡 5:16) 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로 의역한 말씀을 KJV, WEB, ASV는 “Redeeming the time”으로 직역했다. “세월”로 번역된 원어는 καιρός (kairos)이며, “아끼라”는 ἐξαγοράζω (exagorazo-)입니다. καιρός(카이로스)는 시간이라는 개념 중에서 매 순간을 의미하고,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는 속량하기 위해 값을 주고 구해내는 것입니다.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는 신약성서에 4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으니”(갈 3:13)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5)에 쓰여진 속량이 바로 ἐξαγοράζω(엑사고라조)  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해야 하며 어떻게 속량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하지 않으면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의한 칭의 (Justification)는 값싼 은총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은 빛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딛 2:14). 그런데 우리가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하는 순간 순간이 빛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하지 않으면 어둠에 거하게 되어 악에게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을 구속한다(Redeeming the time)”이란 죄와 사탄의 손에서 모든 순간을 값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피값을 주고 사셨다는 것을 믿는 우리는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육체의 남은 때(Χρόνος: chronos는 시작과 끝이 있는 기간을 의미함)를 악에게 빠지지 않도록 값을 주고 사라는 말씀이 Redeeming the time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무능을 시인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서 주인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되어 비로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다. 그리고 나는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할 수 있게 되어 세상을 사랑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καιρός(카이로스)를 속량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쉬지 않고 늘 깨어 숨쉬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기도를 쉬지 말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군가 우리의 자존심을 모욕하거나 상처를 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악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더 이상 악에 빠지지 않아야 하지만, 한순간에 말씀에서 벗어나 영혼을 악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영혼을 잃지 않도록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2:21).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한,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서 왕과 주님으로 통치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에게 빠지는 경우를 약 2:4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지 않고 믿음만 가진 사람은 남의 죄를 들추어내고 정죄함으로써 영혼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의 삶을 의로 알기 때문에 아가페를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쌓았을 때 비로소 은혜 아래 있게 되기 때문에 아가페에 이르는 법입니다. 이 아가페는 그리스도를 따라 형제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가페는 형제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는 것으로 증거됩니다(벧전 4:8).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늘 깨어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의 수련을 닦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해 나는 사람이 성서적 기독교인이며 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법입니다. 이 단계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게 하십니다.

Quiz 1: 8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8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적 수련의 아홉 번째 단계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영성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성 형성의 아홉 번째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단계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영성 훈련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욕과 온갖 종류의 굴욕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순간은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명하고, 열매를 맺으며,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을 확인하는 장기적인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러한 삶에 저항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 덕, 지식, 자제력,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기도할 기도문을 만들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본 수련을 마치고자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께서 이 메시지를 주신 이유를 묵상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묵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해 보세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께서 왜 이 메시지를 주시는지 묵상하고 마음에 울려 퍼지는 생각을 기록해 보세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께서 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지 묵상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세요.

이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영성수련 마지막 단계인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의 말씀으로 수련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단계를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체험케 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19-20)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모습을 보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고전 4:13). 따라서 이 단계는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확증이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증거이고, 주께서 자신을 택했다는 확증이요, 선지자의 대열에 섰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때 이 동네에서 박해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 하셨습니다(마 10:23).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고”(롬 8:18) 하늘의 상이 있으며 선지자의 대열에 들어서는 기회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계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수련의 장에서 마지막 코스를 마치고 증서와 상을 받는 기회입니다(히 2:10, 벧전 5:10). 특히 박해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박해하는 사람이 세상적으로 보면 원수이지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셨고, 바울 역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고 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영성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더욱이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하였기에 원수에게도 한결같이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영성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렀다는 증거입니다(마 5:48).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강하게 되기 때문이고, 때로는 피할 길을 주시고, 하늘에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고지가 여기까지입니다. 이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성령께서 반드시 도우셔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박해하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원수가 네 집안 식구라 하였기에(마 10:36) 가족이든 교인이든 목회자이든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박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내 육의 본성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육의 본성을 향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나를 구원하려고 복음을 증거하는 영성의 사람들을 계속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9번째 단계는 복음 증거자들로 하여금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착한 행실로 빛을 비추는 영성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내가 결국 이 빛을 보고 내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을 깨닫고 벗어 놓도록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그랬을 때 나의 본성이 추하고 악함을 인정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을 영접하면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 주께서 내 마음에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의 유익을 위해 장사하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바꿔주십니다. 또한 기도가 이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기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혼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영성을 사모하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비밀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흡족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깊어지고,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어 영혼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8가지의 영성은 8복과 함께 결국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련한 9 단계의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여 그들로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 하면서 이런 것이 없으면 영성으로 맹인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나무는 그 열매로 어떤 나무인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포도나무의 가지라 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오직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땔감으로 밖에 다른데 쓸데가 없습니다. 마치 사과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듯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의 씨가 있기 때문에 생명있는 사람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영혼구원이라는 열매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하면 반드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성 수련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함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는 내용으로 기도를 마치게 하셨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최종 목표는 죄와 사망에 빠진 형제를 구원함으로써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나로 하여금 나의 육에 속한 본성을 고집함으로써 영혼구원을 실패하게 하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탄 자신이 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마귀가 우리 마음을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아버지께 기도하게 하셨고 또 기도를 마칠 때 역시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기도의 모든 내용과 응답을 아버지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을 맺게 하심입니다.

Quiz 1: 9단계 영성수련을 위한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한 내용을 이곳에 올린다.

Quiz 2: 오늘 수련한 내용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9번째 단계 기도문을 작성하고 이곳에 올린다.

영성 운동의 9단계 요약

마태복음 5장의 9가지 복과 마태복음 23장의 9가지 책망과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과 벧후 1장의 8가지 하나님의 성품과 갈라디아서 5장의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연결하여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영적 눈을 뜨고 주님과 사귐을 날마다 갖기 위함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하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충성”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천국의 문을 닫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는 누가 자존심을 건드리면 분노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천국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맘몬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피 값을 주고 사서 아버지께 드렸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재능과 물질 그리고 시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은 다 주의 것이오니 그 동안 이 모든 것을 제가 주관했던 주권을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 의와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주시고 항상 빛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덕”을 주시고 “애통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자비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내가 눈물로 기도한 영혼이 구원되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하는 기도는 없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이를 위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그동안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무감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던 우리를 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메마르기까지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있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이제부터 지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분별하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허리가 끊어지도록 애통하며 기도하는 눈물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성령의 탄식이 마음에 와 닿도록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제부터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수님 때문에 너희의 종이 되었다고 전파할 수 있게 하옵시고, 예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사도 바울처럼 많은 사람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덕을 세우게 하옵소서. 우리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고 “온유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온유”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로 인해 땅을 기업으로 받고 사람들을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자기를 본받아 사람들을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를 위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인내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높은 직분과 명예를 얻기 위해 당을 짓고 싸우고 분열하고 형제 자매를 정죄함으로써 교인들을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짐으로써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하옵소서. 주님을 알기 위해 무엇이든지 제가 사랑하고 유익했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리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때문에 영혼 구원의 사명을 위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해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성내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 전체가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는 종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제”를 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의”와 거짓말을 절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 영혼이 배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항상 돈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를 위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물질과 시간과 건강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되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보다는 우리의 의를 세우기 위해 사람들을 법 아래 있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으로써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주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옵소서. 이제부터 우리의 의를 내세우는 말과 행실을 절제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아래 있게 하시는 것이니 이제부터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남으로 은혜 아래 있게 되는 감격을 누리고 감사와 찬송을 아버지께 돌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오래 참음”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줍니다. 이를 위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심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셨던 것처럼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도 인내하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빚진 자를 대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사람들을 외면만 보고 평가할 수 밖에 없었기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위선자였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의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 주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옮기기까지 긍휼함으로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악으로 대한다 할지라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 참고 기다리며 복음의 빛을 계속 비추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건”을 주시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겉은 깨끗이 하고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낌 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아버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를 위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깨끗한체 하지만 우리 안에는 탐욕이 가득합니다. 인류의 궁핍을 위해 구제할 돈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아직도 맘몬(mammon)에 사로잡혀 우리의 편리함과 유익을 위해 이기적이니, 가난한 사람을 향한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경건한 삶을 본 보이며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마음의 청결을 위해 욕정을 일으키거나 불결한 생각을 가져다 주는 모든 것에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셨으니 몸과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항상 청결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일곱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제우애”을 주시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화평”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공동묘지처럼 겉은 평화의 모습이지만 속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이를 위해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는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람들을 “나와 그것”의 관계로 대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시험에 들게 하여 몸된 교회를 떠나게 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옵소서. 주님은 언제나 “나와 너”의 관계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는 인격적으로 동일한 관계이기에 우리가 서로 도우며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형제의 허물이 보이더라도 화제로 삼지 않고 덮어주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가 본성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르도록 늘 깨어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이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기에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로 대하지 않고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로 대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형제우애가 있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되게 하기 위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하라 하셨고,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았지만 끝까지 주님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천국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네가 지옥의 판결을 어떻게 피하겠느냐 하며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악을 미워하시는 아버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를 위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라는 영적 단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주님은 세상을 악하다 하여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박해를 피해 웨슬리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무덤과 비석만 꾸밀 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삶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고 타협하며 살았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누가 우리를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면 우리는 악에 빠지는 연약성을 가지고 있아오니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셨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육체의 남은 때를 우리 스스로 그에 합당한 값을 치룸으로써 주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홉번째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안을 활짝 열어 주시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를 욕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듣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아다”라고 기도하게 하신 후 “희락”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로 인해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크다. 이러한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주께서 아무리 주의 종들을 보내셔서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아버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를 위해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우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우리에게 복이 있다 라는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거짓과 모함하는 말을 들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보내신 이러한 선지자들과 종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시했지만, 이제부터 영안을 열어주셔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 가까이 함으로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이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혼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영성에 이르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과 하나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여기까지 영적 단계에 이르도록 은혜를 주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과 모든 영광을 돌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모두 위 같이 믿음으로 9가지 단계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9단계의 기도를 쉬지 않고 묵상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평일과 같이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신령한 몸을 입고 주님 앞에서 주님으로 칭찬받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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